지리산 둘레길 10코스
위태마을에서 하동호까지
2011년 8월 17일 아침 여덟시가 가까운 시간
하늘가애 민박집을 나선다. 신발끈 동여매고 또 길을 나선다.
"하늘가애"
굶지 않기 위해 허겁지겁 빠른 걸음으로 도착한 곳 하늘가애다.
이 집 주인장은 땀으로 범벅된 내 꼴을 보고
먹기 전에 씻으란다. 시원하게 샤워를 하란다.
어쩌지요. 갈아입을 옷을 사라마을에 주차한 차 트렁크 안에 두고 왔는데요.
성큼 방으로 들어가더니 주인장, 바지와 셔츠를 내놓는다
씻고 바지를 입는데 내 허리가 굵은지 바지 허리춤이 작은지 단추를 채울 수 없다.
바지가 내려가면 곤란한데 속옷은 빌려주시지 않으셨으니, 두번 세번 살핀다.
먼저 온 아가씨 둘도 있는데...
저녁 상에는 막걸리를 베풀던 주인장
차를 가지고 돌아온 밤엔 캔맥주에 과일까지 내놓는다.
저기 저 빨갛고 파란 파라솔 아래 둘러 앉아
맑은 하늘이면 달을 애인 삼고 별을 벗 삼으려 했는데
흐린 하늘에 힐끗 힐끗 묘한 자태만 들어내는 달에 애간장을 태우다
내일 일정을 생각하며 열한 시까지만 주인장과 세 명의 길손은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늘가애 정원처럼 자리한 하늘소에 물 흐르는 소리는
자장가일까 아니면 길손들 잠 못들게 하기 위해 심술을 부리는 것일까?
어제 밥 먹고 잠자기 위해 들어서다 저기 앉아 발은 물 속에 두고
손은 포도를 열심히 입으로 나르던 두 아가씨를 보았었지
하동호까지 걷고 마음씨 좋은 주인장과 옥종면 면소재지까지 가서
정말 기똥차게 맛난 점심을 먹고 돌아와
오후내내, 해가 질 때까지 저기 앉아 있었지요.
주인장은 예까지 커피를 끓여 날으고 포도를 대령하고
난 임금놀이, 신선놀음을 했다.
그리고 저녁을 먹은 뒤에는
둘이서 마을 논길을 바람을 찾으며 걸었다.
하늘가애 주인장의 마음을 닮은 수세미
하늘가애 주인장은 이곳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나 자랐고
한때는 삼성맨으로 지금은 부산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시다.
학기 중에는 매 주말마다, 방학 동안에는 줄곧 여기 머물며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기 위한, 정을 나누기 위해, 인연을 쌓기 위해
둘레길 길손들에게 먹을거리와 잠자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다음 카페에서 하늘가애라는 카페를 운영관리한다.
이 주인장을 만나고 싶은 분은 카페를 들러보시라!
위태마을 전경
안개가 낀 위태마을의 아침은 이미 시작되었고
왼편 큰 당산나무 조금 못미쳐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하늘가애가 있다.
마음 좋은 농부가 넉넉한 인심으로 감나무 밭 안으로 길을 터 주었다.
농부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조심해서 걷는다.
감이 익을 무렵, 밤이 익을 무렵 지나는 둘레꾼들은 더더욱 농부의 마음을 지켜주시기를...
살짝 비를 품고 있는 안개다.
안개는 나의 연인처럼
내가 고개들어 앞을 보면 그곳에 그녀는 서 있고
걸어온 길 뒤돌아보면 거기에 또한 그녀는 서 있다.
안개는 나의 어머니처럼
내가 어느 곳을 바라보거나 적절한 거리를 두고 나를 당신 품에 늘 안고 있다.
지네재 오르는 길
나뭇잎에 의지하던 빗방울이
나뭇잎이 지고 있는 무게를 덜어주려 내 어깨 위로 굴러 떨어진다.
여름날의 빗방울이 벌써 송글송글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을 씻겨낸다.
지네재에 올라 잠시 숨을 돌리며
어제 대나무 숲에서 잃어버린 모자대신
하늘가애 주인장에게 빌린 밀짚모자를 이정표에 씌운다.
그 모습이 딱 착한 농부, 마음 넓은 민박집 주인장으로 서 있다.
둘러봐도 지네는 없다.
허리 아픈 사람들이 이미 이곳도 쓸고 간 것일까?
안개 냄새
나무 냄새
바람 냄새
흙 냄새
풀 냄새
그리고 지난간 사람들의 냄새가
이 길에는 농도 짙게 배여 있다.
길 가의 집인데도 불구하고 드나들기 위해서는
하늘사다리를 지나야 한다.
오른쪽 통나무는 내려 올 때 타는 미끄럼틀은 아닐진데...
배롱나무, 또는 목백일홍이 길목마다 화려하게 피었다.
그녀의 백일기도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기도일까?
지금 수능을 치룰 아이를 둔 어머니들도 백일기도 중일텐데!
길들은 우리의 삶을 닮았다.
아니 우리네 삶이 길을 닮은 것일까?
자연은 사람을 품고
사람은 자연 안에 산다.
사람은 자연이고
자연은 사람이다.
회색빛 도시의 정형화된 아파트에는
왠지 사람이 살지 않는 것도 같다.
각이 지고 모가나면 사람이 다치기 십상이다.
각이 지고 모가나면 다가올 사람이 없다.
자연이 사람에게 열려 있듯이
우리네 집들도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곳이 집이기에
집은 서슬퍼런 모습이 아니라 훈훈한 빈틈으로 사람을 살게 해야 좋은 집이다.
바람이 분다.
대나무 숲 사이를 꼬불꼬불 지나 바람이 집으로 들어온다.
태어나 한번도 바람에 흔들리지 않은 날이 없는 대나무 숲은
바람이 일으킨 일렁거림으로 사람들의 집에 들어오려는 온갖 우환들을 막아 서고 있다.
자연을 마주보고
자연 안에서 숨 쉬는 집에 사는 사람들이 한순간 부럽다.
나도 은퇴가 있다면?
마음 흐뭇하게 하는 작은 욕심이 웃음꽃을 얼굴에 한가득 품게 한다.
참 좋다!
모든 것이 동글동글하다.
이 집의 주인장도 동글동글할까?
열려 있어야 한다.
자연이 사람에게 열려 있듯
사람은 자연에게, 또 이웃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열려 있어야 숨이 통하고
숨이 통해야 생명은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
우뚝 하니 ...!
멋지고 폼난다.
외롭거나 슬퍼보이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풍경이다.
양이터재
지리산 영신봉에서 시작해 부산까지 이어지는 낙남정맥이 지나는 곳이다.
이곳을 기점으로 수계가 달라져 여기서부터는 섬진강 수계이다.
바람도 가뿐 숨을 고르고 쉬어간다.
길손도 쉬어간다.
바람이 불러주는 곡조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며 흥에 겨워 나홀로 춤에 빠져든다.
얼쑤~ 좋다!
이제부터 길은 내리막이다.
발걸음이 자기 혼자 알아서 걷는다.
나보다 한발짝 앞서 간다.
시원하게 우렁차게 물소리가 떨어진다.
물소리에 이끌려 길을 벗어난다.
아~ 좋다!
카메라의 조리개와 속도의 수치를 맞추고 앵글을 이리저리 잡아본다.
어느새 새까만 모기들이 벌떼처럼 몰려든다.
죽자살자 달려드는 모기를 쫓으랴
조금더 나은 앵글을 잡으랴 눈과 손이 바쁘다.
관심을 잃은 발은 바위와 낙엽 틈으로 빠져든다.
모기에게 빨린 피보다 바위에 긁힌 상처에서 난 피가 더 많다.
피를 보고서도 울지 않는다. 난 용감하니까!
냇물의 돌다리를 건너고
대나무 숲도 지나고
햇살이 반가운 숲길도 지나고
돌계단도 내려오고
엉금엉금 달팽이보다 더 느린 걸음으로
누가 지켜서서 보건 말건 하는 영감탱이
큰 두꺼비 한놈도 만나고
어느새 길은 하동호로 이어졌다.
이쯤에서는 꼭 뒤돌아 본다.
"아, 내가 저기 저곳을 넘어왔구나!" 하고 걸음을 잠시 멈춘다.
사진을 정리하면서도
이쯤에서는 "아, 바로 저기를 내가 넘어왔구나!" 한다.
하동호
인근 논에 물을 흘려보내는 농업용 댐이었는데 최근에 작은 수력 발전 기능을 갖췄다고 한다.
하동호에 모여든 물은 흘러흘러 사천 앞바다에 까지 다다른다.
도착!
하늘가애 마음씨 좋은 주인장 벌써 나를 마중 나오셨다.
지리산 둘레길을 한달에 한번은 만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소임에서 물러나 언제 다시 지리산을 찾을지 모르겠다.
지리산 둘레길 참 좋다!
또 다시 만날 날을 설레임으로 기다리련다.
지리산, 고맙습니다.
둘레길에서 만난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저와 함께 사진으로나마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셨던 벗님들 고맙습니다.
'길이 있어 길을 걷다 > 지리산 둘레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산 둘레길 9코스 (0) | 2011.09.16 |
---|---|
지리산 둘레길 8코스 (0) | 2011.09.02 |
지리산 둘레길 5코스 (0) | 2011.08.22 |
지리산 둘레길 1코스 (0) | 2011.07.26 |
지리산 둘레길 4코스 -둘- (0) | 2011.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