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의 길 위에서/이웃나라 성지순례

예수의 데레사 성녀 II -엔까르나시온 수도원-

하늘바다angelo 2010. 9. 23. 23:32

 

 

예수의 데레사 성녀 II

-엔까르나시온(Encarnacion, 강생) 수도원-

 

 

 

성 예로니모가 성녀 바올라와 성녀 에우스토치움에게 보낸 서간을 읽고 마침내 데레사 성녀는 수도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19세 때 아빌라 성밖의 엔까르나시온(육화, 강생)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한다.

그 후 20년 이상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가르멜 개혁을 시작하고 이어서 제자들과 함께 스페인 전역을 다니며 일생 동안 18개의 맨발의 가르멜 수녀원을 설립한다.

 

 

수녀원 입구의 대 데레사 성녀상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 일곱 궁방


[영혼의 성]에서 데레사 성녀는 기도의 여정을 [천주 자비의 글]에서 묘사하는 경지를 훨씬 넘어선, 명확하고 완벽하며 성숙한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마치 산 정상에 올라 자신이 걸어 올라온 산길을 굽어 내려보는 등산객처럼, 성녀는 삶의 완숙기에 당신이 걸어오신 기도의 여정을 뒤돌아 보며 이 [영혼의 성]을 쓰셨습니다.

 이제 기도의 여정을 데레사 성녀가 사용하신 표상, 즉 그 하나하나에 많은 방들을 가지고 있는 7개의 궁방으로 구성된 성곽을 내면화시킨 표상을 간단히 살펴봅시다. 기도의 여정은 가장 바깥쪽의 첫째 궁방에서 시작해서 각 궁방을 차례로 거쳐 마지막으로 왕이 거처하는 가장 안쪽의 일곱 번째 궁방에 이르는 여정입니다. 이러한 성곽의 비유는 우리의 내부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고, 기도의 여정은 중심에 있는 일곱 번째 궁방에서 주님과 가장 가까운 일치에 이르려고 점점 더 깊이 다가가는 내적이 여정입니다.

 

첫째 궁방은 영적생활에서 완전히 초보인 사람을 묘사합니다. 그들은 좋은 지향을 지니고 있지만, 여러 종류의 애착과 세상 걱정에 둘러 쌓여 있어 쉽게 악마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둘째 궁방에서 나는 기도를 정기적으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궁방에서 데레사 성녀는 기도에 충실하고 하느님의 뜻에 내 뜻이 합치되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충고하십니다.

 

셋째 궁방에서는 기도 중에 건조함도 체험하지만, 위안도 어느 정도 체험하게 됩니다. 기도는 아주 단순하게 되었고, 이제 조금씩 하느님의 영감으로 관상같이 되어 갑니다. 선량한 많은 사람들의 기도 모습이 바로 이 셋째 궁방의 기도 양상입니다. 그들은 매일 매일 충분한 시간을 바쳐 충실히 기도합니다. 죄를 피하고 덕행을 실천합니다. 데레사 성녀는 이들이 이제 겸손을 배울 때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수도자 성직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 단계에 머물러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선함이 지닌 엄격함이 그들을 얽매여 놓고, 그들의 의로움이 넷째 궁방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겸손과 순진함을 막아버립니다.

 

[영혼의 성]에 나오는 첫 세 궁방은 [천주 자비의 글]에 소개된 첫 두 방법의 물대기와 연결됩니다. 물이 물길을 따라 자연스레 정원으로 흘러 들어오는 셋째 물대기 방법은 넷째, 다섯째, 여섯째 궁방들과 연결됩니다. 정원에 비가 내리는 넷째 방법은 일곱 번째 궁방의 기도 양상과 연결됩니다. 나의 체험으로 판단해 보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셋째 물대기에 머무르며 넷째 혹은 다섯째 여섯째 궁방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매일 매일 충실히 기도해 왔고, 그래서 이 궁방들에 이르러 관상 기도의 단계에 다다르게 된 것입니다. 이제 넷째, 다섯째, 여섯째 궁방들을 살펴봅시다.

 

넷째 궁방은 데레사 성녀가 ‘고요의 기도’라고 부르는 상태입니다. 고요의 기도에서 나는 주입관상을 체험하게 되고, 내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내가 노력해서 쉽게 주님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에 의해 쉬워집니다. 고요의 기도라고 해서 반드시 고요할 필요는 없습니다! 때로는 무미건조함 때문에, 어둠 때문에, 마음과 의지의 지나친 활동 때문에 안절부절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사실 수동적 정화는 이 넷째 궁방의 기도에서 이루어집니다. 분심과 건조함이 가져오는 어둠 속에서 신앙의 정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녀 데레사는 다섯째 궁방의 기도를 “합일의 기도”라 부릅니다. 이 단계에서 기도는 매우 쉽습니다. 때로 나는 평화와 기쁨 속에서 주님께 집중해 있습니다. 때로는 기쁘게, 때로는 그분과의 일치에 사로잡혀 거기에 단순히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 합일의 기도는 전환기의 상태인 듯합니다. 다섯 번째 궁방에 들어간 사람들은 거기에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때로는 여러 주간, 때로는 몇 달 동안, 그리고 몇몇 경우에는 일 년 정도 거기에 머물게 되는 듯합니다.


둘째 회심


다섯째 궁방에서 하는 합일의 기도는 “둘째 회심”이라고 부르는 체험과 연결된 듯합니다.

둘째 회심이라는 개념은 16세기의 초창기 예수회원들에게서 유래되었습니다. 예수회원들에게 첫째 회심이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내어 바쳐 예수회원으로서의 성소를 받아들임을 의미했습니다. 둘째 회심은 몇 년 후에 주님께서 계획하시는 방식에 따라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회원들이 제 3수련이라고 부르는 재수련 기간이 이 둘째 회심을 위한 기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둘째 회심을 위한 기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둘째 회심의 특징은 새로운 기도의 은총, 새롭게 쏟아지는 사도적 열정과 은사, 새로운 깊이에서 이루어지는 주님과의 관계 등입니다.

 

사제 및 수도자들과 함께 일한 나의 체험을 돌이켜 보면, 이 둘째 회심이라는 이론과 개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이론은 진지하게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많은 평신도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 둘째 회심은 단 몇 분에서 혹은 일 주일 정도의 아주 짧은 기간에, 개인기도 중에 혹은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에 은밀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피정 지도 중에 일어납니다. 나의 체험을 되짚어 보면, 많은 사람들의 경우 자신들을 가톨릭과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에 안내해 준 성령쇄신 모임에 참석해서 소위 성령세례라고 부르는 체험, 즉 성령을 넘치도록 받는 기도의 결과로서 얻기도 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 어떻게 발생하든, 이 둘째 회심은 무엇인가를 새롭게 하는 체험입니다. 그것은 새로 태어나는 체험입니다. 기도는 더 순조로와지고, 주님께서는 더 가까이 계십니다.

내 생각으로는 이 둘째 회심이 늘 다섯째 궁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것 같습니다. 데레사 성녀의 가르침과 예수회의 둘째 회심에 대한 가르침을 연결시킨 것을 혹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의 체험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이 다섯째 궁방에서 오래 머문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혼을 즐기는 것과 같이 기쁨 속에서 주님과 위안을 즐기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금방 지나갈 것이고, 주님께서는 나를 여섯째 궁방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여섯째 궁방은 일곱 번째 궁방을 위한 준비입니다. 이 준비를 하는 데 꽤 오랜 기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여섯째 궁방은 내외적으로 시련의 기간입니다. 때로는 엄청난 위로와 특별한 기도의 은혜가 주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내외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것은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기도 속에서 매우 심한 건조함을 체험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근본적으로 의심하는 상황이 따라오기도 할 것입니다.

 

일곱째 궁방은 영적결혼의 상태로서 주님께서 머무시는 방에서 주님과의 친밀한 일치에 머무는 상태입니다. 시련이 다 끝나지는 않았지만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주님과의 친밀하고 깊은 일치가 주는 평화가 있습니다. 병이나 타인과의 문제를 비롯한 여러 문제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들이 나를 방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주님께 집중되어 있습니다.( http://blog.daum.net/happyplus126에서 모셔왔습니다)

 


엔까르나시온 수도원을 들어서면 마당 가운데 이 십자가가 서 있고

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일곱개의 원이 그려져 있습니다.

원 하나가 한 개의 궁방을 의미하고

가장 십자가에서 먼 원이 일궁방이고 가장 가까운 원이 칠궁방입니다.

아직 저는....!!!

 

 

                                    

수녀원의 창틀마저 정갈함과 단순함을 느끼게 한다

 

 

 고요함, 단순함, 항구함 그리고 열정적인 투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수도자

성녀 대 데레사의 따뜻한 시선이 빛을 타고 존재 한가운데를 흐른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사용하던 의자

 

십자가의 성요한은 성녀 대 데레사의 영적 동반자이다.

성인은 이곳 수녀원의 고해 사제였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사용하던 성작

 

수녀원의 박물관에는 십자가의 성 요한과 관련된 유품들이 다수 보존되어 있다.

 

 

수난 중의 예수님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에서 한 마리 어린양처럼

모욕, 수치심, 능멸, 저주, 야유, 빈정거림

 

성녀 대 데레사 곁에는 항상 이 수난 중의 예수님이 함께하고 있다.

성녀는 어느 날 성당에서 기도를 하던 중 매질을 당하시는 예수님을 그린 상본을 보고

또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을 통해 크게 깨닫는다.

그 결과 "그때까지 나의 생활은 나 자신의 것이었으나 그 후부터는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생활이었다."고 자서전에서 기록하고 있다.

자기 안의 예수님의 생활, 이것이 바로 데레사 성녀의 신비생활의 기본이다.

성녀의 이런 생활은 곧 바오로 사도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갈라 2,20)라는 말씀과 동일하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수도원 제대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을 때

환시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형상을 본다.

일반적인 십자고상과는 달리 공중에 비스듬히 떠 있는 그리스도를 성인이 내려다 보는 것 같았고

특히 왼쪽에서 옆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빛줄기에 의해 매달린 에수님의 양팔은 뒤로 쭉 뻗었고

못이 양손을 뚫고 지나가 있으며 머리는 앞으로 꺽이고 무릎은 굽혀져 있었다.

 

이 그림은 성인이 자신이 본 환시를 직접 그린 것이다.

 

살바도르 달리는 이 그림을 본 뒤 "표현주의적이고 기괴한 감각으로 그리스도를 해석하고

추함을 통해 감동을 얻으며 자신의 그리스도가 아름다우신 분이심을 보여주고자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라고 했다.

 

 

 

너무나 적나라하게 예수님의 고통을, 상처를 묘사한다.

이는 곧 우리 죄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이다.

 

 

 수녀원 문의 안쪽

바깥쪽에는 문고리가 없다 안쪽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다.

줄을 당겨 종을 울리면 확인을 하고난 뒤 문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