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 성프란치스코의 숨결이 흐르는 평화의 땅
-San Francesco d'Assisi, La Terra di Pace-
성프란치스코와 그의 12명의 동료들이 처음으로 공동체를 일구어 생활했던 곳리보또르또(Rivotorto) 움막입니다,
성프란치스코를 향한 순례의 첫 출발지로 선택했다.
비가 오는 아시시,
촉촉히 비로 젖은 대지 위에 성프란치스코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며
오늘도 꿋꿋이 당신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저 멀리 아스라한 뒷배경으로 평화의 땅 아시시 또한 세상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함께 봉헌하고 있다.
천사들의 모후 성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degli Angeli)은 뽀르지운꿀라(Portiuncula)를 품에 안고 있다.
아시시 성 아래 들판에 위치하고 있다.
성프란치스코의 성상 곁에는 항상 흰비둘기가 머물고 있다.
성프란치스코의 가난한 거처, 작은 경당 아래 숨어있었다.
성프란치스코 대성당, 3층 구조로 되어있다.
성프란치스코의 생가 앞의 작은 공간
아버지가 성프란치스코를 감금했던 곳
이야기가 녹아있는 성프란치스코의 탄생지, 마굿간.
지금은 예쁜 경당으로 순례자의 무릎을 꿇게 한다.
골목길에서 만난 그 유명한 fiat사의 cinque cento
아시시의 가로등은 잘 살펴보시면 모두 동일합니다.
성녀글라라 대성당 광장에서 바라본 풍경
글라라대성당의 전면부
글라라대성당 좌편 경당에서는 성체현시와 함께 성체조배가...
발소리마저 숨소리마저 멈추게 합니다.
중앙 제대
주교좌 성당입니다.
골목길, 그 모퉁이 마다 눈길이 멈춥니다.
그냥 휙 지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순례자의 집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때마침 수녀님께서 밝은 미소로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순례자들이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마련된 경당의 입구 성수대
경당의 오른쪽은 성프란치스코와 그의 첫 동료들의 무덤이 벽을 사이에 두고 있다.
마냥 머물고 싶은 곳, 몇번을 순례해도 다시 가고 싶은 곳,
제2의 그리스도, 가난과 평화의 사도 성프란치스코,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프란치스꼬는 당시의 보통 젊은이들과 같은 충분한 교육과 훈련을 받았고 그에 따라 다른 젊은이들처럼 부유한 상인이나 기사가 되는 포부를 지녔다. 그러나 일단 그가 회개한 후부터, 그는 오직 자신의 완덕을 성취하고 그를 따르는 이들을 완덕으로 이끄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1202년 뻬루지아와 아씨시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프란치스꼬는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1년간 포로 생활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다른 포로들은 비통에 젖어 있었지만 프란치스꼬는 매우 평화로운 상태에 있었으므로 다른 이들을 놀라게 하였고 이들 중 여럿은 프란치스꼬와 대화를 나눈 후에 화해를 하고 평화를 되찾곤 하였다. |
포로에서 풀려나 아씨시로 돌아온 프란치스꼬는 다시 그전처럼 일상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병을 얻었다. 병중에서도 그는 가끔 산책을 하곤 했는데 그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자연 경관들이 그를 사로잡았다. 어느 날 밤 그는 이런 환상을 보게 된다. "그의 아버지의 가게 안에 수많은 전쟁 장비들이 있었고 한 여인이 그 곳에서 약혼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장비들은 너의 병사를 위한 것이고 약혼녀는 바로 너에게 예정되어 있다." 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또한 기사가 될 꿈을 꾸고 1205년에 뿔리아(Puglia) 원정군에 입대하는 길에서 스뽈레또를 지나가고 있을 때 또 다른 목소리를 들었다. "주인과 종 가운데 누구를 택하겠느냐"" "물론 주인입니다"라고 그가 대답하자 다시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거기에서 네가 할 일을 가르쳐 주겠다"라는 소리를 들었다. 전에 없이 기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때 그의 나이 24세쯤이었다. 그에게는 친구들이 권하는 세상의 축제들이 무의미해져 갔다. 점점 강해지는 다른 갈망으로 그는 새로운 길을 찾아 기도와 탐구를 시작하였다. 하느님께서 그의 이런 갈망에 대답을 주시리라 생각한 그는 아씨시의 동굴을 산책하곤 하였다. 어느 날 그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과거의 죄를 통회하며 기도하였다. 아씨시로 말을 타고 돌아오던 중 우연히 나병 환자들을 만났는데, 본능적으로 나병 환자 곁을 피해가고 싶었지만 그는 곧바로 말에서 내려와 나병 환자를 포옹하고 자선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 그들을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까지 하였다. |
어느 날 프란치스꼬는 다미아노 성당 앞을 지나다가 성당 안으로 들어가 나무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프란치스꼬야, 쓰러져 가는 나의 집을 수리하여라." 그 말씀은 그리스도 교회를 말하는 것인데 프란치스꼬는 글자 그대로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해야 한다고 이해하였다. 곧바로 그는 그의 말과 장비들을 팔아 성당 수리 비용을 마련하여 주임 사제에게 봉헌했으나 그가 거부하였으므로 성당 창문 옆에다 돈을 놓고 떠나갔다. 얼마 후 주임 사제와 성당 수리를 함께 하기로 협의하고 일을 시작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란치스꼬의 아버지는 매우 화가 나서 프란치스꼬의 행동의 부당성과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시 법원과 교회에 의뢰하는 바람에, 프란치스꼬는 만인들 앞에서 결정적으로 자신의 정당성과 앞으로의 활동을 천명해야 했다. 프란치스꼬는 아씨시 주교와 군중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사람들은 내 말을 들으시오. 지금까지 나는 베드로 베르나르도네를 나의 아버지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나는 그에게서 받은 돈과 의복들을 돌려줍니다. 이제 나는 하늘에 계신 유일한 아버지 한 분만을 섬길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가족들과 이별을 하였고 주교는 그에게 망토를 건네주며 십자가를 걸어 주었다. 1208년 2월 24일 성 마티아 축일에 사도들의 파견에 관한 복음 말씀, 즉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가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 어떤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고장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거기에서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그 집에 들어갈 때에는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마태 10,9∼12)를 듣다가 자신의 결정적인 성소, 즉 "거룩한 복음의 양식을 따라 살아야")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유언 참조. 한다는 성소를 발견하였다. 프란치스꼬는 이 말씀의 해석을 한 사제에게 부탁하였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금이나 은, 돈도 소유해서는 안 된다. 길을 떠날 때 식량자루도 돈지갑도 빵도 지팡이도 가져가서는 안 되며, 신발도 두 벌의 옷도 가져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나라와 회개를 선포해야 한다"고 하자, 이 설명을 들은 그는 하느님의 영 안에서 기뻐 외쳤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하던 바다"(1첼라노 22). 프란치스꼬는 이 말씀을 가난과 복음 전파에 대한 계시로 알아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 때부터 복음은 프란치스꼬의 생활 규칙이 되었으며 거룩한 복음에 따라 살기 시작했다. |
프란치스꼬는 이제 하느님의 부르심을 확실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물질적인 성당 수리가 아닌 영적 차원의 교회의 쇄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활기차게 설교를 시작했다. 바로 이 무렵에 프란치스꼬와 같은 생활을 하고자 하는 "첫 동료들"이 그에게 합세했으니, 이들은 뀐따발레의 베르나르도, 까따니아의 베드로, 아씨시의 에지디오 등이다. 곧이어 그와 동료들은 12명이나 되어 리보또르또(Rivotorto)에서 거친 움막 생활을 하였다. 성 프란치스꼬는 그의 동료 두 명과 함께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하느님의 뜻인지 알기 위해서 성 니꼴라오 성당의 미사에 갔다. 영성체 후 그들은 성서를 3번 펼쳤는데 그 내용들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주신 말씀이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마태 19,21),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루가 9,3),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이러한 말씀을 듣고 그는 "우리가 해야 될 일과 미래의 우리 형제들이 해야 될 일을 보십시오. 나의 형제여!" 하고 외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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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의 수효가 증가함에 따라 프란치스꼬는 자기 자신이 더 이상 그들의 유일한 생활 규범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형제들의 생활 양식이 더 자세히 규정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따라서 형제들이 실행해야 하는 "회칙"과 "생활"을 기록하였다. |
몇 가지 갈등들과 프란치스꼬 자신의 병약함 때문에 프란치스꼬는 1220년 총회에서 총장직을 사임하고 까따니아의 베드로를 총장으로 임명했으며 그에게 순종을 서약하였다. 그는 유능한 법률가로서 창립자의 이상을 충실히 지지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곧 사망했고, 엘리아 봄바로네가 그를 계승하였다.
* 성프란치스코의 생애에 대한 글은 작은형제회 한국 관구 홈페이지 www.ofm.or.kr/stfrancis.html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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