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사
고 운 사 孤雲寺
-경북 의성
2014년 7월 10일 사촌마을과 가로숲 걷기에 조금은 실망을 하고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주룩주룩 흘린 땀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발길을 고운사로 돌렸다.
고운사는 신라 신문왕 원년(서기 681년)에 해동 화엄종의 시조이신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신 사찰이다.
부용반개형상(연꽃이 반쯤 핀 형국)의 천하명당에 위치한 이 사찰은 원래 高雲寺였다.
신라말 불교와 유교ㆍ도교에 모두 통달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여지ㆍ여사 양대사와 함께 가운루(경북 유형문화재 제151호)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인 孤雲을 빌어서 孤雲寺로 바뀌게 되었다.(www.gounsa.net 에서 발췌)
고운사로 가는 길
공사 차량들이 지나가지만
한적한 길이 마음에 든다.
키 큰 나무, 수령이 많아 보이는 나무들이
허공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며
세상의 불량스런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계를 서는 듯하다.
나는 이 세상의 불량스런 기운이 아니기를 희망하면서...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서
고운사 가운루
고운사의 얼굴이라 불릴만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누각이 가운루이다.
아래로는 계류가 흐르고 뒤로는 산과 구름을 접하는 신선의 세계가 펼쳐진다.
고운사는 의상대사가 681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현재까지 경북 북부 지방의 중심 가람으로서 전통을 자랑하고, 가람 건축의 짜임새도 뛰어난 곳이다.
의상대사 창건설 말고도 신라말의 대학자인 최치원이 창건했다는 설도 전해져서 더욱 이채롭다.
전설인즉, 고운 최치원이 여지, 여사라는 두 스님과 이 곳에 와서
가허루(駕虛樓)와 우화루(羽化樓)라는 두 누각을 건립하였고,
이 때부터 최치원의 호를 좇아 고운사라고 불리웠다는 것이다.
최치원은 유학자이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의 풍류도를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풍류도란 신라 화랑들과 같이 산천을 찾아 다니며, 심신을 단련하고 자연을 숭상하는 수행법이자 일종의 종교적 행위였다.
당대의 대 지성이요, 풍운아였던 최치원이 언제 죽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는 가야산에서 산신이 되었다는 설이 풍미했을 정도로 신선도나 도교의 성인에 가까웠다.
최치원과 밀접한 인연을 간직한 고운사는 도교적 이미지로 가득한 절이다. 뒷산의 명칭도 뭉게구름을 뜻하는 등운산이고, 최치원이 세웠다는 가허루나 우화루 역시 도교의 신선들이 타고 다니는 비행체들을 뜻한다.
물론 도교 또는 풍류도의 도사가 불교 사찰을 창건했다는 전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단지, 이 땅의 산세가 신선이 노닐만한 선경이라는 점,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지 신라말에 최치원과 관계가 되었기에 형성된 창건 연기가 아닐까.
가허루는 현재 가운루(駕雲樓)로 바뀌었고, 우화루는 우화루(雨華樓)로 이름이 바뀌었다.(www.gounsa.net 에서 발췌)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자 고운(孤雲)·해운(海雲).
86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www.gounsa.net 에서 발췌)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8호로 지정되었다.
구계리 등운산(騰雲山)에 있는 고운사 경내 비탈진 언덕의 나한전(羅漢殿) 앞에 있는 석탑이다.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 수 없고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풍수상지법(風水相地法) 등의 학설로
우리 민족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친 고승 도선(道詵)이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탑의 전체 높이는 약 3m이고 2층의 기단(基壇) 위에 세워져 있다.
기단은 가로 1.5m, 세로 1.5m, 높이 1.2m의 정사각형이다. 옥신에는 우주(隅柱:모서리기둥)가 새겨져 있고, 기단부와 옥개석이 약간 훼손되었다.
옥개석(屋蓋石:지붕돌)은 팔작지붕 형상이며,
통일신라시대 말기의 다른 탑들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특징 없이 단순 소박한 모습이다. (두산백과에서 발췌)
요사[ 寮舍 ]
사찰 내에서 전각이나 산문 외에 승려의 생활과 관련된 건물을 아울러 이르는 말.
뒷건물은 선원
만덕당 툇마루에 앉아서...
만덕당 기둥에 여기 앉아 쉬어가세요(?) 라는 글이 있어서 앉았다.
종무소 지붕 위로 둥글둥글 산의 모습이 포근하다. 보름달처럼...
뒷산의 이름은 뭉게구름을 뜻하는 등운산騰雲山
구름에 따라 하늘색이 바뀐다.
사는 것, 주변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 하지만 받지 않을 수 없더라...
누군가 도는 무엇이오? 하고 묻는다면
아마도 난 그냥 눈만 멀뚱멀뚱 거릴거야!
우화루에는
정갈하게 찻잔이 놓여있더라.
여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야!